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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Children's Biography by 이종현

강동현 2002.04.18 20:10 조회 수 : 26313 추천:109

  '88년말 사쿠라이 가츠토시(1970년생/보컬, 기타, 송라이팅), 다하라 겐이치(1969년생/기타), 나카가와 게스케(1969년생/베이스), 스즈키 히데야(1969년생/드럼)등 4인의 고등학교 동창생으로 결성된 아마추어 밴드는 '89년 전국 아마추어 록 밴드 콘테스트에 출전했으나 입상에 실패하면서 데모 테이프 제작과 라이브 활동에 주력하게 되는데 이 즈음 현재의 밴드명인 미스터 칠드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음반사와 음악 관계자들에게 보낸 데모 테이프에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약간의 실망감을 느낀 미스터 칠드런은 밴드를 해체하고 보컬리스트 사쿠라이 혼자 솔로 활동에 나서기로 한다. 그러나, '92년 뒤늦게 데모 테이프를 입수한 중소규모 레이블 토이스 팩토리 (Toy's Factory)가 이들의 신선한 록 사운드와 패기를 높이 산 끝에 앨범발매를 제의하고 이내 4명의 멤버가 다시 모여 첫 앨범 제작을 서두른다. 최고의 프로듀서 고바야시다케시를 제 5의 멤버로 삼아 만든 데뷔 앨범은 상업적으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으나 매니어들에게는 충분히 어필, 높은 호응 속에 신인으로는 극히 드문 전국 투어(10회 공연)를 시작하게 된다. 몇개월 후 전국대학교 주변을 돌며 펼쳐진 'Your Everthing 투어(13회 공연)'의 완전 매진을 통해 화제를 모은 미스터칠드런은 이내 두번째 앨범 Kind of love를 발표하고 쉴 새 없이 앨범 발표 기념 투어를 다시 시작하는데 이즈음 이들은 라이브 능력이 뛰어난 실력파 밴드로 이미지를 굳힐 수 있게 된다. 컬리지 계열 인기 밴드들과 4회에 걸친 '1993 서머 이벤트' 합동 공연을 끝내자 마자 3번 째 앨범 Versus를 발표하는데 그간 쌓아온 커리어와 홍보 활동의 덕택에 예전과는 다른 높은 인기를 얻게 된다. 팬들의 요청에 의해 펼쳐진 시부야 소규모 공연과 또 다시 '서머 이벤트' 공연에 초청된 이들은 1년만인 '94년 9월 1일, 가을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4집 앨범 Atomic heart를 발표한다. 300만 장이 넘는 엄청난 판매고로 단숨에 일본 역사상 최다 판매 앨범 기록을 바꿔놓은 이들은 두 곡의 싱글을 연이어 히트시켰고 여세를 몰아 무도관 등의 대형 공연장으로 규모를 넓혀 22회에 걸친 'Atomic Heart 투어'를 펼친다. '95년 1월 미스터 칠드런은 일본 대중 음악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80년대를 풍미했던 이름 구와타 게이스케(서던 올스타스와 구와타 밴드의 리더)와 자선 조인트 싱글 '기적의 지구'를 발표하게 된다. 얼마 뒤 미스터 칠드런과 구와타는 자신들의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비틀즈의 레퍼토리를 엮은 록 오페라를 펼치는데 이 공연은 NHK를 통해 방영되어 국내에서도 큰 화제를 모았다. 몇개월간 공백기에 들어간 미스터 칠드런은 프로듀서 고바야시 다케시와 다큐멘터리 필름 제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5월 성공적인 극장 개봉으로 일본 대중 음악 역사에 록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또 하나의 사건을 탄생시켰다. 야외 대형 공연장으로 규모를 넓혀 투어를 펼칠 즈음 9번째 싱글'시소게임'을 발표, 첫주 1위는 물론 비디오 클립도 대단한 호평을 받았으며 활동 영역을 아시아 전역으로 넓히게 된다. '96년 6월 24일, 거의 2년만에 새 앨범 [심해]를 발표한 미스터 칠드런은 무려 6개월 간에 걸쳐 일본 전역을순회하는 60회의 'Regress or Progress' 대형 투어로 일본 열도를 들끓게 한다. '97년 벽두부터 새로운 싱글과 앨범에 대한 소문은 급속도로 퍼졌고, '97년 3월 초, 동경 시내 전역을 채색한 노란 해바라기의 화려한 디스플레이 속에서 마침내 미스터 칠드런의 5년간의 활동을 정리하는 새 앨범Bolero가  선보였다. 앨범 발표를 기념하는 3월 23, 27, 28일의 도쿄 돔 경기장 콘서트 후, 도쿄 FM의 스페셜방송에 출연한 미스터 칠드런은 돌연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완전한 해산이 아닌 임시 휴업이라고못박아두긴 했으나 들 리는 얘기에 의하면 휴식은 장기화 될 전망이라고 한다. 임시 휴업을 결정하게 된배경은 두 가지로 분석되고 있는데, 첫째는 연이은 투어와 신보 작업 등으로 극도의 피로가 누적 되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고바야시 다케시와의 불화에서 기인한 것이라 한다. 고바야시 다케시가 자신의 밴드마이 리틀 러버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 보컬리스트 아코와 결혼하면서 마이 리틀 러버의 활동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됐고 자연히 미스터 칠드런에 대한 관심은 예전만 못해졌다는 것이 멤버들의 주장이다. 사실 지난해 앨범 [심해] 부터 고바야시의 참여는 현격히 줄었고 반면 보컬리스트 사쿠라이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바야시는 여전히 미스터 칠드런의 이권에는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어 그간 심한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미스터 칠드런은 잠시간의 휴식을 통해 고바야시와의 완전한 독립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홀로서기를 통한 새로운 활동의 시기가 언제일지는 전혀 알려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98년 2월 새 싱글을 발매하며 영원한 해산이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다.

    글: 이 종 현(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