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형식으로 잠깐 블로그에 끄적거려 본 글을 옮겼습니다.
2005년 10월 초를 회상하며.
그 날 저녁은 동기 누나를 만나서 그룹 프로젝트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10월 초순이라고는 하지만 날씨가 제법 쌀쌀한 것 같아서,
외투 없이는 왠지 추울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10월 초에 외투를 꺼내입자니, 왠지 남새우스런 기분이 들지 않더랍니까.
아무리 추운 한겨울에도 패션을 위해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할 줄 아는,
유행과 패션감각에 민감한 여대생들이 판치는 이 곳에서
저도 일명 '범생이'라고는 하지만 패션에 완전 깜깜한 세대는 아직 아니기에
외투를 꺼내 입는 건 왠지 부끄러웠습니다. 아무리 춘추용의 외투라고 하더라도.
하지만 동기 누나에게 잘 보일 이유도 아니거니와,
군중속의 익명, 그저 남에게는 저는 '아무개'라는 생각에 결심을 굳혔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조금 튀어보인다 한들 어떻겠습니까.
저는 모르는 사람들의 눈초리보다는 제 자신이 훨씬 소중합니다.
조금 오버스러워진 생각에 장갑도 꼈습니다.
사실 저는 겨울에는 습진으로 고생하기 때문에
손을 되도록 추위와 건조에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3년전에 생일선물로 받은 장갑. 왼쪽 집게 손가락에 구멍이 나서 올해만 쓰고 버려야 겠습니다.
자, 이것으로 다 되었습니다. 아직 목도리를 할 계절은 아니니까요.
외투에 손을 찔러넣고, 기숙사 밖을 나와 캠퍼스 광장으로 향합니다.
어두운 밤하늘, 가로등의 불빛이 비추는 아래로 보이는 무수한 사람들.
아무도 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만나기로 한 장소인 도서관 로비에 서서 저는 외투와 장갑을 벗었습니다.
이윽고 누나가 왔고, 누나는 제 외투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습니다.
이내 과제물에 몰두함에 따라 이렇게 저 혼자만의 궁상은 아무 문제 없이 끝납니다.
11월이 되면서 저는 집에 내복을 보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상의는 두꺼운 스웨터를 입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입지 않고 하의만 입고는 합니다.
러닝셔츠나 내복 상의는 입으면 티가 쉽게 나기에, 소심한 저는 그것만큼은 솔직해지지 못합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친 뒤, 해가 진 깜깜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사납게 불어대는 찬바람에 추위를 불평하는 이를 더러 봅니다.
그럴때마다 저는 바지 속의 내복을 생각하며 씨익 웃고는 합니다. 내복이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입니다.
보이지 않기만 한다면 누군가를 속이는 것도 개의치 않습니다.
한때의 패션이 저를 먹여살릴지는, 그건 진정 모르겠지만
저는 그래도 만년 내내 변하지 않을 솔직한 따스함을 더 좋아합니다.
그게... 어찌나~ 따듯하던지..^^;
추위에 떠는 다른 친구들을 보면서 괜시리 기분이 좋와지더라구요..ㅋ